{규민단편팬픽} In His Case

목제 : In His Case

저자 : 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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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란 이름의 새장.
어둑한 터널 사이를 통과하는 전철의 가벼운 흔들림 사이로 많은 상념들에 빠져들고는 한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전철 차창
너머로 비추였다.
새벽에 내린 비가 스며든 모양인지 지하내부를 감도는 공기가 축축하다.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지하철에 올라탄다. 오늘도 변함없
이 사각의 칸 안을 만원으로 꽉 채운 지하철은 사람내음으로 그득했다.
사람들의 옷깃들에게 부대끼며 핸드폰으로 주식정보를 확인하고, 최근에 구매한 DMB핸드폰으로 아침뉴스를 흩어보기도하고, 지하
철 곳곳에 놓여진 조간일보를 들춰보고 어딘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다보면 생각보다 이르게 회사에 당도하곤 했다.
여느 때처럼 지하철로 출근을 하는 성민은 목적지에 도달한 전철에서 부랴부랴 내려 미적지근한 걸음으로 출구로 나선다.
높다란 빌딩들이 빽빽하게 둘러싼 거리가 눈 앞에 보인다. 어둑한 하늘이 그 자신의 기분만큼이나 찌뿌둥하다.
서울의 하늘은 푸르른 날이 없었다. 11월 중순의 늦가을하늘은 먹구름에 가리어 침통하기까지했다.
탁 트인 공간 속에서도 괜히 숨이 막히는 기분에 기침을 하며 그 큰 빌딩 중 하나를 향해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뎠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대기업들의 고층빌딩들이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답답하게 매인 넥타이를 조
금 느슨하게 풀며 익숙하게 회전문을 통과해서 엘리베이터를 대기한다.
일찍 출근한 덕분에 탑승자는 성민 혼자인 엘리베이터는 반투명식으로 창 밖이 훤히 보였다. 30층의 휘청거릴 것만 같은 층수 중에 평
소처럼 16층을 눌렀다.
딩- 하는 소리와 함께, 녹음된 안내원의 목소리가 사근하게도 들려온다.
네모진 공간의 기기가 서서히 작동되는 것을 미미하게 느끼며 성민은 엘리베이터 내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막 30대에 들
어선 그의 얼굴은 30대라기에는 상당히 젊어보이며, 싱싱하기까지 해보이는 외모이다. 젊었을 적에는 보기좋게 살도 있었던 두 뺨은
세월이 흐르면서 볼품없이 해쓱해졌지만 연한 살구빛이 도는 피부는 까슬한 수염 대신 솜털이라도 있을 것 같이 부드럽다.
아침에 급한대로 손을 본 앞머리를 빗어넘기며 성민은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음을 의식했다. 조만간 주말에 미용실에 가서 뒷머리를
다듬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손가락을 머리카락에 부빈다.
한 차례 거울을 보고나면 금새 목적지인 16층에 도착한다. 홍보 마케팅부 D프로젝트 개발팀. 라는 표지부가 반듯하게 걸린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성민은 ‘대리’라는 호칭을 달게 된다.
**
최근 유럽 내에서도 인정을 받은 기술력덕분에 전자제품의 대량 수출이 증폭하여 주가가 날로 상승하고있는 대기업 H그룹의 홍보마
케팅팀 3년차 대리인 성민의 하루는 오늘 수행할 서류를 점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회사 내에서 제법 능력있고 성실한 직원인
그의 업무수행능력은 상부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칭찬을 받으면 그만큼 댓가가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하계 중간검점에서 우수한 평을 받은 후에는 업무가 2배로 늘어서, 간간히
야근도 해야할 정도로 바빠졌다.
또각또각 구두굽소리가 묵직하게 바닥을 울렸다. 적당한 크기의 사무실 안으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원 중 한 명인 성민이 들어서자
몇 없는 젊은 직원들이 반가이 웃으며 맞이했다.
“이 대리님, 오늘도 일찍이시네요.”
부탁하지도않은 커피를 뽑아다주며 최근에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이 빙긋 웃었다. 지하철의 따스했던 온기와는 다르게, 이제서야 난방
이 틀어진 사무실은 아직 공기가 춥다.

하지만 버릇처럼 윗 정장을 벗어서 의자에 걸쳐둔 성민은 한기에 온 몸을 바르르 떨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그냥 그저그런
싸구려 자판기커피의 맛이 입안에서 머물었다가 금새 위 속을 데운다.
한 손에는 종이컵을 쥔 채 데스크탑의 모니터 전원을 눌렀다. 녹색빛이 들어오며 시작을 알리는 컴퓨터의 기기음이 익숙했다.
어젯밤에 마저 완료하지못한 서류을 �어보며 커피를 마신다. 해야할 일은 태산같은데 피곤함에 눌린 어깨가 찌뿌둥했다.
“이 대리님. 안녕하세요?”
옆 책상에 앉는 신입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온다. 쾌활한 성격의 그는 들어온 지는 이제 한 달 되었지만 그새 적응한 듯 성민에게도
말을 걸기도 하고있었다.
신입사원은 항상 윗 선배들이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것이 관습과도같았기때문에 경력으로나 직급으로나 한 계급 위인 성민이 그를 맡
았다. 신입인 그에게는 상냥한 상사인 성민이 직속이 된 것은 운이 좋은 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성민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기보
다는 이 유쾌하고 발랄한 신입사원에게 이끌려다니는 것은 오히려 성민이었다.
박유천이란 이름이 명함카드에 적혀 그의 가슴팍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고나서야
사원의 반듯한 얼굴을 마주하며 ‘네…… 유천씨도 안녕하세요?’ 라고 형식적인 인사를 답한다. 생긋 웃는 표정도 겸하여 보내는 답인
사에 유천의 안면 가득 천진한 미소가 퍼졌다.
“오늘 날씨가 너무 어두워요. 눈이라도 오면 좋겠는데-”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유천 창 밖의 잿빛하늘에 울상을 지으며 서류가 네임별로 분류되어있는 파일을 서랍에 넣었
다.
‘뉴스를 보니 강원도엔 눈이 온다더라고요. 좋겠다, 벌써부터 눈이 오다니.’ 어린아이같이 태연한 말에 성민은 작게 웃는다.
이런 춥고 냉랭한 날에는 오히려 따스한 햇빛을 기대하고싶은데, 문뜩 비춰보이는 창가의 하늘색은 그런 기대는 일랑 생각지도 말라
는 것처럼 울적한 빛이다. 하다못해 보송보송해서 기분이 좋을 것만 같은 눈발들보다는 비가 올 것같은 날씨였다.
습하고 기운없는 안개들이 망연히 빌딩들을 휘감고있었다.
매일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준비운동처럼 해오는 명상타임은 오늘도 빠질 일 없이 번복되었다. 마케팅 부내의 최고참 김부
장님의 출근을 기준으로 아침명상을 위해 모두들 자리에 착석하여 눈을 감고는 라디오의 스피커에 귀를 기울인다.
이때만큼은 항상 활달하고 생기발랄한 직원들마저도 숨소리가 들리지않을 만큼 조용하게 앉아 명상에 잠겨들곤했다. 바람소리 물소
리 자연의 음을 담은 배경음악 사이로 나른한 남성의 목소리가 비잉 빙 실내를 감돌았다.
마음을 비우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라는 남자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성민의 머릿속은 엉킨 철사만큼이나 다단복잡했다. 애써 눈을 감으
며 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찌뿌둥한 날씨만큼이나 머리가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
성민은 제법 인기있는 남성직원이었다. 낯을 가리긴했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려깊은 성격과 예의바른 태도. 흔히 모성을 자극
한다고 표현하는 순진해보이는 외양은 젊은 여사원들에게 있어 호감적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K대 경영학과 출신에 가정교육을 잘 받았음을 증명하는 반듯한 분위기. 담배와 술 등의 그닥 유쾌스럽지 못한 문화와
는 거리가 먼 그의 성실한 생활태도 또한 여자들에게 있어서 환상적인 조건임에는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름만 들어도 ‘좋은 곳에 취직하셨네요.’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 기업의 대리를 맡고있으니, 탐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
을 만 했다.
비록 작년 초봄 즈음 오른손 약지에 끼어지게 된, 심플하고 정갈한 디자인의 약혼반지가 그의 동료들간에서 발견이 되어지면서부터
사내 마케팅팀에 소속되어있는 여직원들 다수의 아쉬움을 한 몸을 받았던 그였지만 어쨌든 같은 회사 내의 상사로써나, 선배로써도
나쁠 게 없는 사람이었다.
“이 대리님. 이거 결제할 서류 복사 다 되었는데요. 어디다 둘까요?”
“예. 여기다 두세요. 나중에 제가 정리할게요.”
서류는 쳐다보지도 못 한 채 타이핑에 몰두한 성민의 책상 위로 흰 종이들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따라 자판기에서 손가락이 미끄
러지기를 반복했다. 할 일은 태산같은데 도통 마음먹은대로 손가락이 움직여주질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남아있던 커피를 입에 털어넣
었다. 그새 식은 커피맛이 참 알딸딸했다.
이런저런 업무 끝에 성민은 첫 결제를 받기위해 반대면의 책상에서 한참 골머리를 앓고있는 부장님에게 다가가 서류를 내민다. 피곤
한 기색의 중년남자의 시선이 종잇자락을 �고 금새 붉은 도장 하나가 쾅 찍힌다.
도장이 찍힌 종이들을 내려다보며 성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총괄담당인 마케팅부의 기획실장에게 가서 서류를 확인받
고 결제확인을 받으면 오전업무량은 완벽하게 끝나는 것이지만, 성민은 그의 책상에 앉아 서류를 쥔 채 잠시 머뭇거린다.
옆에서 끙끙거리며 현황실적 보고서작성을 하고있던 유천이 ‘어디 아프세요?’ 라고 물어오는 게 들렸지만 성민은 대꾸하지않았다.
뭔가 사형선고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불안해보이는 그를 흘깃거리며 쳐다보던 유천은 의아해할 뿐이었다.
자신보다 몇 달을 먼저 들어온 또래 사원이 속삭이듯 ‘원래 11시 무렵이면 저러셔.’라고 사정을 얘기하긴 했지만 유천은 한동안 성민
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곧 일과 중 가장 편안할 점심시간이건만, 그런 상황따위는 성민의 안중에 없는 듯 했다.
11시 45분 무렵이 되자 마치 정해져있던 일과처럼 벨이 울려온다.
부장은 사정을 들을 것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성민에게 ‘이 대리, 호출입니다.’ 라고 그에게 전달한다. 잘 다듬어져있던 손톱을 불안
한듯 잘근잘근 물어뜯던 성민이 흰 손으로 수화기를 들어올려 사내에서 연결된 호출을 받으면, 이미 익숙해질 익숙해진 여성의 목소
리가 수화기를 타고 그의 귓가에 안착한다.
“이 성민 대리님, 조 규현 실장님께서 호출하십니다.”
**
‘조 실장님은 이 대리님을 정말 아끼시는 거 같아요.’ 가볍게 장난처럼 지나가는 말들을 들으며 사무실을 빠져나온 성민의 안색이 아침
보다 더 파리해져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도통 나을 기미가 보이지않는다. 하지만 한 두번 있는 증상이 아니었기에 성민은 잠자
코 미간을 꾹꾹 누를 뿐이었다. 유천이 계속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성민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왔다는, 소위 말하면 외국물을 먹은 젊은 실장에 대한 소문들은 비일비재했다. 붕 뜬 구름처럼 이리저리 흘러나
오는 소문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소문은 새로온 기획실장인 그가 H그룹의 차기 후계자라는 말이었다.
낙하산을 타고 온 것처럼 입사하자마자 기획실장 자리를 꿰차고 들어선 그를 처음에는 모두들 꺼려하는 듯 했으나, 기획실장은 생각
보다 만만치않은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29살밖에 되지않은, 실장직을 맡기에는 젊은 나이이지만, 탁월한 업무능력과 돋보이는 안목들이 예사롭지 않음에 입사 8개
월 만에 마케팅팀 내의 가장 고참인 김 부장님이 결국 꼬리를 말았다. 능력과 권위 앞에서는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김부장이 태도를 바꾸자 금새 마케팅부는 관료제 특유의 상명하복의 분위기에 휩쓸리듯 실장에 대한 태도가 물갈이된 것마냥 싹 바뀌
었다. 그와 동시에 마케팅 부의 실적도 좋은 상승세를 보이고있었다. 새로 부임해온 젊은 실장의 능력은 사뭇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배경보다도 성민은 기획실장 그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직책을 맡고있는 박과장이나 김부장들보다
는 한 수 아래인 그로써는 본의 아니게 실장과의 대면이 잦았었다. 그 대면의 원인은 부장과 과장들의 떠밀림도 있었지만, 실장 직속의
호출에 의한 것도 곧잘 있었다.
성민의 속내가 복잡한 것을 알아줄 리가 없는 사내에서는 그런 실장의 호출을 ‘간택’이라 칭하며 성민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곤했다.
성민은 동료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할 때마다 나오는 그 명칭이 참으로 거북했다.
하지만 결제는 항상 거쳐야할 사항이었고, 선택권은 딱히 없었다. 의자에 파묻히듯이 앉아 질린 표정을 지은 채 구겨진 종이컵으로 손
장난을 하던 성민이 몸을 일으킨 것은 기획실장에게서 호출이 떨어진 지 5분 남짓이 흐른 후였다.
직속상사와 팀은 항상 하나로 결속되어있어야한다는 의미 하에 기획실장의 사무실은 그다지 멀지않다. 1층 위에 홀로 그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있을, 실장실이 위치한 17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별로 오래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성민의 발걸음때문에 1분,2분
짤막하게 시간이 지체되곤했다.
괜한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까 하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망설이던 성민이 결국은 비상계단을 통해서 17층으로 올라섰다. 흰 페
인트가 칠해진 비상문을 열고서 쭈뼛거리며 걸어오는 그를 데스크에서 반기는 비서의 표정은 여러번 겪어본 것처럼 태연했다.
“실장님. 이 성민 대리님 도착하셨습니다.”
성민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먼저 이어졌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어오세요.’라고 회답하는 목소리가 상
당히 젊었다. 웬지 모르게 하얗게 질린 듯한 안색으로 성민은 고개를 숙인 채 마케팅부 기획실장실 이라는 푯말이 붙은 문을 힘겹게 밀
며 안으로 들어선다.
화이트톤의 사무실내는 깔끔하고 심플하다. 주인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한 그 모던한 분위기에 성민은 움츠려들었다. 문을 닫고 조심
스레 고개를 올리니 낯익은 사내가 보인다.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 있는 서적들이 곱게 꽃혀있고 그 사이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책상에 올린 남자의 외모는 꽤 준수한 편이
었다. 검회색 셔츠를 입은 채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소매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팔이 가늘지만 강단이 있어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죠?”
규현은 빙긋 웃었다. 검은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성민을 향해있었다. 웃고있는 얼굴이 이지적이면서도 묘하게 서늘했다.
기가 눌린 성민이 주춤거리며 탁자 위로 서류를 올려놓기위해 책상으로 다가섰다. ‘오, 오늘 결제사항입니다.’하며 내려놓는 서류 대신
규현이 잡아챈 것은 성민의 작은 손이었다.
보드라운 감촉, 규현은 마치 매끈한 대리석 공예품이라도 �듯이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성민이 하던 말을 채 잇지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손을 애써 빼려고 하고있었다.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연한 분홍빛 말랑한 손가락에 달겨드는 남자의 손은 한랭해보이는 흰색이
다.
“이거… 제발 놓으세요. 실장님…….”
“왜 이렇게 겁을 먹고 그래요. 이성민씨.”
성민이 손을 빼려고 힘을 주자 규현은 웃는 낯으로 성민을 잡아끌었다. 작은 소음을 내며 책상 위로 쓰러진 성민을 내려다보는 규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성민의 표정이 겁에 질려있었다.
“한 두번도 아니잖아요?”
끼익, 의자에서 일어난 규현은 넥타이를 풀었다. 단추가 몇 어개 풀어진 사이로 드러난 목선이 단아하다. 회색빛 넥타이를 손에 쥔 채
오묘한 미소를 짓는 규현을 차마 마주하지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성민에게 규현은 고개를 내려 굳게 다문 입술을 농락하기 시작한다.
작게 저항을 하는 그의 뒷통수를 강하게 누르며 입술 새를 침투한 규현의 입맞춤에 금새 성민의 눈꼬리에 말갛게 눈물이 매달린다. 호
흡이 가파오르고 책상을 쥔 손 마디가 하애질 정도로 세게 부여잡은 그의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있었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 새를 물어뜯을 것처럼 맹렬한 입맞춤이 끝나고나서의 성민의 표정은 울기 직전처럼 눈썹이 흐트러져있었다. 이후
에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상당한 시간을 경험해왔던 성민으로써도 치욕적이었고 괴로운 일이었다.
배려도 없고 그저 우위에 놓인 자의 의지대로 이어지는 키스로 인해 숨이 막혔다. 억지로 호흡하기위해 흐읍- 하며 거칠어지는 숨 사
이로 자신의 오른손이 보였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던 말처럼, 그와 그녀의 영원한 결혼관계를 약속하는 실버링의 다이아몬드반지
가 약지에서 처연히 빛났다. 성민은 순결한 맹세에게 죄의식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
성민은 여태 상사에 대한 저항이란 것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한번쯤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개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직원이었다. 성격부터가 그랬다. 부탁을 거절할 줄도 모르고, 남을 밀쳐낼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규현에게는 사뭇 반항적인 그였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사무실을 기어 도망다니며 사내의 손길을 뿌리치기위해 애를 쓴 적도
많았다. 성민이 반어거지로 실장실에 출입하게 된 지 약 6개월 동안, 둘의 옷자락에서 떨어져나간 단추와 와이셔츠 수가 상당한 양이
될 지도 모른다.

될 지도 모른다.
허나 그 저항은 강자의 힘에 모래성처럼 바스러지고, 이윽고 공포가 찾아왔다. 딱 한번 죽기 직전까지 규현에게 몰리고나니 이미 두려
움에 굴복한 몸은 저항이란 것을 생각치도 않는 듯 하다.
으레 키스가 끝나고 나면, 성민은 규현이 이끄는대로 무릎을 꿇고서 규현의 바지를 끌러내려 조심스레 펠라치오를 하곤 했다. 아니 해
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진갈색 구두 끝이 어디를 짓누를 지 알 수 가 없었다.
보기좋은 모양새의 입술이 자신의 것을 머금고서 듣기만해도 소름이 돋는 음란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규현은 흡족해하는 듯 했
다.
“으, 흐읍… 하ㅇ…으.”
금새 크게 팽창하는 것에 괴로워하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절정이 임박해오자 규현이 더욱 더 거세게 성민의 머리카락을 그러쥔다. 윽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따뜻한 액체가 성민의 입안을 가득 채운다. 울상을 지으며 성민이 그걸 뱉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반절은 엉
겁결에 넘어간 듯 켁켁 하며 기침을 해댔다.
이 쯤 되면 규현만이 아니라, 성민도 몸이 달아오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오랫동안 시달려온 몸은 이성을 배신하고서 금새 낯익은 손길
을 알아차리고서 그것에 기대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거부할 틈도 없이 슈트의 바지가 벗겨지고 브리프까지 모조리 방구석으로 던져
진 성민이 낯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자 규현이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부끄러워요?”
사근한 목소리, 부드러운 어조가 귓가에 닿는 순간 성민의 양뺨이 붉게 물든다. 그리고 순식간에 손가락이 둔부를 헤집고서는 에널 사
이를 침범해들어온다. 앗 하는 짤막한 교성과 함께 책상의 양모서리를 붙잡고 성민이 허리를 숙였다. 억지로 벌려진 사타구니 사이를
관찰하듯 �어보던 규현의 시선이 여린 피부 사이로 느껴지는 것 같아 성민은 시선을 피하려 애를 쓴다.
‘제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를 묻어버리려는 것처럼, 손가락 두 개가 점차 공간을 벌려들며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 다른
전희도 없이 흠뻑 젖은 그곳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욕스럽게도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않는 몹쓸 몸뚱아리가 배출해
낸 음란한 액이 줄줄 흐르다못해 어느새 허벅지를 타고서 천천히 곡선을 그리고있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되어있으면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게 더 우습네요.”
“아, 으흣, 앗,아…! 싫……ㅇ아…!!”
“싫어요? 그럼 화장실에서 할까요?”
규현의 말에 성민은 겁에 질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성민은 화장실을 무서워했다. 처음 당한 장소가 바로 화장실이었다. 그 경험때문
인지 트라우마가 된 기억은 극도로 성민을 나약하게 만들곤 했다.
‘그럼 싫다고 하지말아요.’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성민에게 마주하던 규현은 더 거세게 손가락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남
아있는 왼손은 셔츠자락을 넘고 들어가 이미 흥분해서 꼿꼿이 서있는 유두를 매만진다. 일반적인 남자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상처자욱
과 붉은 멍이 매달린 가슴팍을 규현의 마른 손이 즐거운 듯 마구 문대었다.
책상을 잡은 채로 흐느끼던 성민의 입술 새로 점차 농밀하면서도 더운 숨이 끊임없이 내뱉어진다. 성민이 점차 울음소리 사이로 신음
을 흘려내보기시작하자 규현은 빙긋 웃었다. ‘음란해.’ 이미 달아오른 성민의 귓가에 대고 킥킥대며 속삭이던 규현이 손가락 개수를 늘
려서 집요하게 뒤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벌써 3개를 넘어서 4개째 받아들이고있는 작은 구멍은 한껏 늘어나 사내의 손가락을 잡아먹
을 기새로 벌름대고있었다.
아아, 하는 신음소리를 토하는 성민의 땀과 눈물, 그리고 입가에 고여있던 타액들이 책상 위로 뚝뚝 떨어졌다. 결제를 받으려고 들고
왔던 서류가 책상에서 아무렇게나 놓여져 팔랑대고있었다. 위로 떨어지는 액체들로 인해 흰 a4용지 가득 배인 잉크들도 번져들어간
다.
“으응… 아…ㅎ……”
테라스글라스의 바로 앞에 검은 물체가 둘을 노려보듯이 잠자코 서서 번뜩이는 렌즈를 굴려댄다. 캠코더가 가벼운 진동을 내며 돌아
가고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성민이 고개를 숙여 렌즈를 피하려했지만 규현이 머리채를 부여잡고서 성민의 얼굴 그대로를 캠코더의 동
공에 들이박았다. 울음과
더불어 격렬하고도 달콤한 쾌락에 엉망이 된 표정부터 난폭하게 흔들리는 흰 몸뚱아리까지 고스란히 찍히고 있을 그 작은 기계의 시
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성민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질척한 행위가 연결되었다. 성민이 결국 참아내지못하고 한 번의 파정을 마치고나서 널부러져있는 것을
규현은 가만 두지않으려 했다. 억지로 질질 끌려간 적갈색의 가죽소파가 덜덜 떨리는 그의 눈동자 안으로 촉촉히 젖어 들어온다.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테이블에 억지로 올려진 성민이 훌쩍거리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서운 손길이 여린 살결에 닿았다.
그 서늘한 아픔에 바짝 긴장한 성민의 둔부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규현은 망설임이란 것은 존재하지않는 것처럼 단순한 동작으로써 깊
숙하게 삽입해들어왔다. 이미 충분하게 젖은 구멍이 갈라지며 성민의 허벅지도 넓게 벌려진다. 페니스가 한치의 틈도 없이 모조리 삼
켜지고나서야 규현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얕은 신음만을 내지르던 성민의 양 허리께를 부여잡고 한껏 부벼대던 규현이 성민을 뒤로 끌어당기며 소파에 앉았다. 순간
규현의 허벅지 위로 올라타버린 성민은 뱃 속이 쿵 하고 울리는 기분에 생목으로 악을 써가며 고개를 저었다. 끔찍할 정도로 아프다.
지옥의 한 켠에서 뒹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이 노랬다 까매졌다를 반복했다.
‘아파… 아ㅍ……제발! ㅇ……!!’ 출렁이는 소파의 폭신함덕분에 움직임도 배가 되었다. 처음에는 배려하듯이 얕았던 움직임이 종반에
이르자 격렬하게 휘저으며 성민을 한껏 괴롭힌다. 고통에 입술을 달싹이며 규현이 이르는 대로 엉덩이와 허리를 움직여 끙끙대던 성
민은 규현의 거센 몸놀림을 따라가지못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엉엉 울었다. 허리가 흔들리고, 마치 신호처럼 몸짓에 맞춰 신음도 흘러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묘하게 간지러운 부분을 한껏 찔리자 숨이 막히면서 시야가 하애졌다. 정지된 순간. 남은 것은 절정에 치달아 혼란스
러운 몸의 떨림뿐이었다. 따뜻한 액체가 몸 깊숙히 흩뿌려지는 것을 느끼며 성민은 사내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정에 이르고서도 규현은 한동안 성민에게 빠져나오지않았다. 눈물을 품는 성민을 마치 어르고 달래듯이 깊게 키스하는 행위만큼은
여지껏 보여준 난폭성과는 달리 달큰했다.
안개처럼 성민의 뺨 위로 번져드는 눈물색이 잿빛이었다.
**

가진 게 많을수록 사람에겐 열정이 적어진다. 주변이 풍족하고, 노력하지않아도 손쉽게 이룩할 수 있다는 것만큼 사람을 무료하게 만
드는 게 있을까.
규현은 가끔 삶에 회의를 느끼곤했다. 이것저것 알 수없는 공식행사로 덮힌 자신의 스케쥴도, 허레의식적으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
도, 학교에서 보내는 학업시간도 지루할 따름이었다. 염세주의. 사춘기의 규현은 종종 쇼펜하우어에게 동질감을 느끼고있었다.
규현의 아버지는 한국 20대 그룹 축에서도 상류층에 속하는 H그룹의 회장이었다. 능력있고 뒷배경이 탄탄한 아버지에 걸맞게 뒤지지
않는 배경을 가진 규현의 어머니는 서울 내의 미술관 하나를 소유한 미술관 장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호화스러운 두 사람의 사이에서
유일한 아들인 규현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않든 간에 어릴 적부터 차기후계자 수업을 위해 아버지를 따라 해외지사에 자주 이끌려가
야만 했었다.
그 덕분에 유치원,초등학교 등의 교육기관 내에서의 추억이 없었다. 남들은 하나씩은 가지고있을 법한 학예회 사진 하나 조차 없었던
규현의 유년기는 그로 하여금 ‘지겨움’에 대한 정서를 일깨우는데 한 몫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속은 새카맣게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아있지않을지라도, 겉만으로는 누구에게 비교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성실한 우등생인 그였다. 예
의바르고 성실하고, 고급스러운 교양문화에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줄 알고, 시사와 정치에 있어 학식과 견문이 넓었다. 그리고 치밀하
고, 계산적인 면모까지. 아버지는 규현이 사업가로써의 기질이 다분하다고 믿고있었다.
외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을 한 규현은 적당한 수속과 간단한 테스트 후에 한국의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H그룹이 재
단으로 있는, 서울권에서도 명문으로 유명한 학교는 규현에게 별 다른 만족감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그냥 외국에서 교육과정을 마친
뒤, 아이비리그로 들어가도 될 것을, 곁에 데리고서 친절히 훈육을 하시겠다는 당신의 고집으로 인해 한국에 돌아온 것이 그닥 유쾌하
지 못했다. 머물고 있던 영국의 음울한 공기와는 다르게, 서울은 너무나도 어지러운 환경이었다.
‘대기업 그룹의 차기후계자’라는 타이틀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였음에 틀림없었다. 선생들은 모두 새로 편입해 온 규현의 소문을 들은
이후로는 그의 눈치를 보며 살살 기고 학우들은 그를 시샘 반 혹은 경외와 부러움의 눈길로 쳐다보곤 했다.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 가면
이라도 쓴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규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취했다.
속이 울렁거릴만치 답답하고 겉치레에 감겨있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못하고 겉으로 내돌기시작한 뒤로는 규현은 학교도서실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보통 때에는 옥상을 자주 찾곤 했지만, 바보같은 녀석들이 옥상에서 삥을 뜯다 된통 걸린 이후로는 교장의 엄중한 처리
란 명목 하에 옥상의 문에는 주먹만한 자물쇠가 걸렸다. 덕분에 심적인 안식처를 잃고서 교실 내를 방황하던 그의 눈에 두번째로 뜨인
그다음의 장소가 바로 도서실이었다.
상당수에게 금새 질려 손을 놓아버리는 규현에게도 책은 나름 재밌는 존재였다. 종이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가 그나마 자신이 추구하
고있는 어떠한 자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규현은 러시아문학을 좋아했다. 일상적이고 어디에서나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조차도
풍자해내는 그들의 문학사고가 나름 마음에 들어서였다.
도서실은 좀처럼 사람이 드나들지않아서, 늙은 사서교사는 매일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곤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안경을 쓰고서
가끔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읽는 그는 생기가 없어 빛바래고 허약한 모습이었다. 항상 안락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영미 시집을 중얼
거리는 사서교사를 대신하여 작고 아담한 도서실을 관리해주는 것은 한 명의 학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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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란 이름을 가진 그는 규현보다 한 학년 위로, 교내 사서부의 유일한 부원이었다. 학교 끝자락에, 그것도 가장 마지막 층에서 쓸
쓸히 있는 도서실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않아서 도서실에는 기껏 해야 식후땡을 위해 최적의 장소를 찾던 머저리들이 근방의 창
문가에서 담배를 꼬나물다가 성민에게 내�기는, 사소한 에피소드 외에는 방문객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서도 도서실은 단순히 법적인
의무 하에 운영되는 존재일 뿐, 그 어느 혜택도 주지않았다. 그래서 도서실은 항상 손때가 묻은 것처럼 낡고 이가 빠져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민은 마치 새로 개업한 카페라도 돌보는 것마냥 참으로 바빠보였다. 항상 책을 한가득 손에 들고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황갈색 바닥을 쓸고 닦고, 가끔은 인스턴트 커피믹스를 몇 개 들고와서 하루에 한 잔 씩 사서 선
생님께 커피를 타드리는 등의 잔업도 도맡아서 했다.
얼굴이 햐�고, 마치 어린아이들의 젖살처럼 보들보들한 뺨은 소설의 한 문락에서 튀어나온 문장들처럼 살구빛이었다. 얄쌍하고 갸날
픈 건 아니지만 보기좋은 목과 어깨 굴곡이 얼굴만큼이나 동그란 곡선이었다. 분명 남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있는데도 묘하게 소녀같
은 인상이었다. 게다가 항상 찡그리는 일 없이 웃는 낯으로 규현을 반기고했다.
“오늘도 왔어요?”
사심없이 반기는 목소리는 사춘기의 사내아이치고는 곱고 부드럽다. 열 여덞이라는 숫자에 어울리는 분위기면서도 가끔 터져나오는
사소한 행동들이 다섯살짜리 아이같기도, 이제 중학교에 입학한 여중생같기도, 때로는 모든 것을 표용해줄 것만 같은 모성을 자아내
기도했다.
그다지 득 볼 것도 없는 도서실의 자질구레한 일따위에 매달리는 것도, 어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한 성격도, 나이에 어울리지않
는 순해빠진 웃음도. 모두 규현의 세계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풍족하고 돈에 너그러운, 가식의 세계에서는 감히 만져볼 수도 없을 순수
의 가치가 그에게 존재하고있었다.
규현은 이 희한한 선배에게 조금씩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
성민은 혼자서도 여러가지 사건들을 벌이곤했다. 야무지게 생긴 거에 비하여 이런저런 작은 실수가 잦았다. 특히 수많은 실수 중에서
도 항상 반복하는 실수는 대부분 기계를 다루는 일이었다. 복사기, 팩스기, 경보장치, 방송스피커기기 등등. 그중에서도 유독 컴퓨터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무척이나 번거로워했다. 항상 모니터 앞에 앉아 끙끙거리기 시작하면 10분이고 20분이고 일어나질 않았다. 그러
다 점심시간이 흐르고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당황해서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에는 대부분 규현이 잡혀들었고, 규현은 본의아니게 성민이 벌려놓은 컴퓨터작업을 손수 도와줘야만 했다. 간단한 전산처리인
데도 말썽을 피우는 그를 어이없는 표정을 쳐다보는 규현에게 성민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요. 제가 좀 기계치라서…’ 기어들어가듯 말하는 목소리에 차마 면박을 줄 수도 없고. 한 두차례를 넘어서서 이젠 일주일에 서
너 번은 컴퓨터를 바보로 만드는 행동에 규현은 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선배님은 아무래도 아날로그 세대이신가봐요.’
농담식으로 툭 던진 말에 으흐흥 하며 쑥쓰러워하는 듯한 그 웃음소리는 이따금씩 귀를 간질거리게 하기도 했다. 의자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신기한 눈망울로 규현과 모니터를 쳐다보는 성민의 숨소리를 느끼며 규현은 난생 처음 타인에게서 모호한 감정을 느꼈다.매달려 신기한 눈망울로 규현과 모니터를 쳐다보는 성민의 숨소리를 느끼며 규현은 난생 처음 타인에게서 모호한 감정을 느꼈다.
둘은 컴퓨터로 인해 급격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전산처리를 규현이 도맡아서 해주곤 했다.
가끔은 성민이 규현에게 컴퓨터를 배우기도 했다. 여러 달이 지나고나니 이제는 규현이 도와주지않아도 어느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었지만 성민은 별로 그러고싶어하는 것 같지않았다. 규현도 별로 거절할 생각없이 그의 일을 도우곤 했다.
규현은 성민이 웃는 것이 좋았다. 여태껏 만나온 어느 그룹의 여식들처럼 분기가 묻어나는 웃음이라거나, 득을 바라고서 내밀어지는
텁텁한 손길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웃음이었다. 그냥 새하얗고 밝았다. 그 이상 그 외의 느낌이라고는 좀처럼 느껴지지않았다. 청량한
물내음이라도 나는 것같은 화사한 웃음이었다. 그 소박한 웃음이 흐드러지게 핀 배꽃같았다고 생각했다.
복잡다단하게 얽혀지는 그 감정은 싹이 트고 어느새 저 깊숙한 어둠에서부터 살라먹어들어온다. 살구빛의 가을날, 규현은 성민에게
서서히 가까워지고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몸과 몸의 친분도, 정신적으로의 교제도 아니었다. 그 고통스러운 감정은 사춘기의 소년에게 하여금 갈망에 대한 욕망
과 희생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있었다.
그때만해도 그 상서로운 감정 하나가 어긋나 서로에게 칼날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성민은 기절한 것처럼 규현의 품에 기대어있었다. 바이어들와의 순활한 계약을 위해 얼마전에 사들인 고급 가죽소파라는 것을 알면
서도, 가장 보기싫은 상대에게 기대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벅지와 다리가 한껏 벌어진 채로 놓여있었지만 그것을 추스릴 힘조차 나지않았다. 벌려진 허벅지 사이에서는 묽은 정액이 이리저리
묻어있었다.
규현은 느릿한 손짓으로 성민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흥분을 유도한다거나, 희롱하는 거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행동처럼 가볍게 손바
닥이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성민이 숨을 내쉴 때마다 쉰 소리가 목에서부터 새액 색 하고 올라왔다. 하얀 그의 얼굴은 눈물에 젖은 채
퉁퉁 부어 엉망이었다.
“좋았어요?”
규현은 성민의 귓볼을 잘근잘근 씹으며 나즈막히 속삭인다. 그 소름끼치는 행동에 성민이 바르르 몸을 떤다. 왼팔을 들어 애써 밀쳐내
려 해보지만 금새 힘이 빠져버리는 바람에 밀려나는 것은 오히려 성민 쪽이었다.
“그렇게 밀쳐내지말아요.”
‘실컷 즐겨놓고는, 이제와서 발뺌하려고요?’ 규현의 말에 성민은 고개를 젓는다. 거부도, 저항도 아니었지만. 긍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형식적인 대답에 불과한 그 고갯짓에 규현은 아무 말 없이 성민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춘다.
“예뻐. 이성민. 한 군데도 안 예쁜데가 없어.”
“평생, 죽을 때까지 내 꺼야. 그 년한테 안 줘. 선배가 내 눈에 뜨인 이상, 선배가 울어도 나는… 선배를 그 여자한테서 뺏어올거에요.”
성민의 오른 손 약지에 얌전히 껴있는 반지를, 조금은 의도적인 손길로 매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웃었다. 진심이 담긴 얼굴에
성민은 두려워 눈을 감았다. 자신도, 규현도, 그리고 규현의 손에 쥐어있는 흔적들도.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땅속으로 꺼져들어가야 안식할 수 있을까.
돌아갈 곳이 무너져가는 것을 버텨낼 힘조차 없는 무기력한 자신에게 혐오와 부정을 느끼며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어간다. 꿈에서만큼
은, 모든 것이 평안할 지도 모른다. 성민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꿈을 꾼다.
잠든 성민을 소파에 누이고서 규현은 호출을 통해 마케팅부의 김부장에게 성민의 조기퇴근을 일러두었다. 점심시간이 얼핏 지난 무
렵, 규현은 비서의 점심식사 및 바이어와의 1차 미팅이 있다는 스케쥴 통보를 물리치고서 성민이 누워있는 소파 맞은 편에 앉았다.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며, 잠이 깊게 든 듯 미동도 없이 잠든 성민의 얼굴을 응시하던 규현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과 코, 입술 등을
매만졌다.
익숙하고 친근함에서 느껴지던 정이란 존재는 점점 부풀어올라 심장을 좀먹어들어갔다. 그저 한낱 ‘선배’와 ‘후배’라는 울타리 속의 사
이좋은 관계였을 뿐인 둘의 관계는 이미 파국으로 치닫은 지 오래였다. 코에 입을 맞추고, 울고있는 눈꺼풀 위를 핥으며 규현은 생각하
고 또 생각한다.
어차피 망가진 관계라면, 망가진 채로라도 가져보겠다고.
“…선배.”
도망가지마요.
오랜만에 가져보는 욕심이 어색하지만, 참으로 달콤했다.

벌써 십년 정도가 되어가는 오래전의 시간들. 탁 트인 교정들이 창문 가에서 내려다보여지던 높은 공간의 그 곳.
빛바랜 장소에서는 낡고 축축하지만, 익숙하고 그윽한 향내가 났다. 종이냄새같기도했다. 그 어렴풋이 추억이 담겨진 아른한 내음 사
이로 스며든 커피냄새가 잘 어울리는 조합처럼 공기 중을 떠돌고있었다.
꿈일까. 눈동자가 뿌옇게 시야를 잡았다. 마치 눈물이라도 흘린 것처럼, 두리뭉실 떠 있는 시선들 사이로 잡히는 장소는 낯선 곳이 아
니었다. 한동안 잊고있었던 기억 속의 장소였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있을까, 학교의 추억이라고는 여기 하나에 다 실려있을텐데. 성민은 얕게 미소를 지었다.

항상 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사서선생님은 보이지않았다. 그를 대신해 남아있기라도한 듯 반듯하게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온기가 이미 가신 지 오래이다.
오래 된 컴퓨터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자신이 붙여놓았던 분홍색 키티 스티커가 그대로이다. 생경
한 기분이었다.
바깥이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창가를 쳐다보니, 눈이 쌓인 학교의 교정 사이로 검고 하얗고 번쩍거리는 승용차들이 빼곡히 운동장을
차지해들어있다. 항상 기죽어있던 국기도 오늘따라 계양기에서 힘차게 펄럭거린다.
플랜카드가 펄럭이며 교문앞에 붙어있었다. 성민은 그제서야 그것을 향해 눈동자를 크게 뜬다. ‘제 28기 H고등학교 졸업식.’ 28기는
성민이 졸업했던 시기와 같았다.
‘드디어 찾았다.’
꿈 같이 고결한 기분에 사로잡혀있는 그의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있다. 웃음기서린 그 말소리에 성민은 무의식적으로 시
선을 뒤로 돌린다. 창가에서 스며나온 햇볕이 부서질 듯이 눈에 파고들었다. 잠시 눈을 두어번 찌푸리고나서야 앞에 있는 인영에게 눈
을 맞출 수 있었다.
종이내음이 아스라이 사라져간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옅은 스킨냄새가 난다.
은회색 겨울풍경 사이로 햇살을 망토처럼 두른 것마냥 하이얀 그곳에서는, 낯설지않은 이가 웃고있다. 사그락사그락 금방이라도 흩날
릴것같은 눈송이를 어깨에 가득 묻히고서 소년은 웃고있었다. 왼쪽가슴에 붉고 노란 실로 교표가 수놓인 검회색 교복이 정장 못지않
게 단정하다.
‘졸업식인데 여기서 뭐하세요. 한참을 찾았어요.’
‘아….’
성민은 멋쩍게 웃었다. 부모님도 안 오신 졸업식이었다. 다들 바쁘신 걸 알기에 졸업식일짜도 알려주지않았었다. 그래서 그 날은 혼자
서 도서실에 앉아 마지막으로 볼 그 풍경들을 바라보고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의 기억이 꿈으로 돌아온 걸까. 성민은 앞에서 밭은 숨을 조금씩 가라앉히며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를 쳐다본다.
단정한 얼굴 가득, 팔불출같다며 놀렸던 환한 웃음이 그려져있다.
그래, 저 때의 그는 참으로 순수하고 밝았었다. 마치 품에 안겨있는 희고 노란 꽃다발처럼, 신선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졸업 축하해요. 선배.’
그 때의 당신은, 겨울볕처럼 따사로왔었는데…
**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숨을 가쁘게 내몰아쉬며 일어난 성민이 시계를 확인했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거리를 좀먹어들어가고있었다.
태양이 서산너머로 내�기며 버거운 한숨을 토해낸 것같은 붉은 노을이 잘도 기울어지고있었다.
온 몸이 메마르고 아팠다.
무의식적으로 왼 손에 있을 시계로 눈길이 간다. 5시 43분. 예정대로라면 퇴근시간대일테지만, 온 몸이 무기력하여 도저히 일어서야겠
다는 생각이 들지않았다.
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참아내며 간신히 상반신만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척추를 마비시킬 것처럼 격렬하게 밀려
드는 통증에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줄이라도 끊어진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다. 성민은 눈물을 삼키며 팔에 힘을 주어 억지로 몸을 세운다.
기계적으로 옷을 주어입었다. 옷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어 자락들이 미열이 남아있는 예민한 살결에 닿을 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든
다.그 느낌에 괜시리 힘 빠진 웃음이 나왔다.
잘 다려져있었을 와이셔츠는 바닥 어딘가에 널부러져 구겨진 채 있었지만 아무 생각없이 옷가지를 꿰어입고서 조심스레 문가로 발을
옮겼다. 오피스의 문을 밀어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본다. 비서도 퇴근한 모양인지 넓은 대기실에는 아무도 보이지않았다.
온 몸이 무너지는 듯한 격통을 참아내며 길거리로 뛰쳐나온 성민은 택시를 잡았다. 출퇴근 시간이면 항상 깔깔하게 굴던 택시기사가
성민의 안색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태웠다. 빠릿하게, 그러나 조금은 안정감있게 속도를 내는 택시에서 성민은 눈을 감았다.
한바탕 기절한 것처럼 자고왔지만, 몸이 눅눅한 빵처럼 묵직한 기분이었다.
.
집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뻗어버리고싶을 만큼 온몸이 녹록히 지쳐있었다. 허나 이제 갓 백일이 지난 된 딸을 안고서 문을 열어주는
아내에게 저녁인사도 해야했고, 저녁도 먹어야했고, 항상 무료해보이는 그녀의 일상을 위해 소소한 대화라도 건네줘야하는. 가장의
직무를 맡은 성민에게는 아직 거쳐야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상적인 전례를 미루고서 집에 오자마자 곧장 샤워실로 직행했다. 억지로라도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면 설움
에 찬 눈물이 꾸역꾸역 올라올 것만 같아서, 일부러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샤워실로 숨어들었다.
온 몸 구석구석을 물로 적시고서 쪼그려앉은 후 격통이 느껴지는 은밀한 그 곳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렸다. 주춤거리는 손길이 능숙
하게 샤워기를 그 곳으로 내밀어 맑은 물로써 굳어있는 정액을 느슨히 빼낸다. 우습게도, 자주 겪어보아 익숙한 행위였다.
김이 서린 거울을 바라본다. 처량맞은 얼굴이 곰살맞은 표정을 지은 채 웃고있었다. 아니 울고있었는지도 모른다. 허무함, 허탈감에 잠
식한 표정이 거울속에서 뭉뚱그려진다.
“…흐, 흑…….”
볼이 축축해졌다. 샤워기의 꼭지는 이미 닫은 지 오래인데 콧잔등과 두 뺨, 턱밑까지 축축해진다. 안식처라고 생각한 곳에서 눈물을 토
해냈다. 나무문 하나를 걸쳐두고 엇갈려있는 바깥에서는 그 누구도 성민을 몰라준 채 평범한 일상의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학교도, 회사도 여지껏 빠지지않고 나가던 성실한 그의 인생 처음으로 결근을 한 아침은 나른하기 그지없었다.
아내는 그의 곁에 서서 그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갈아준다. 하얀 얼굴에는 별 다른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수건을 갈아주는 그 사
소한 동작만큼은 그녀의 성격처럼 유연하고 섬세했다.
죽조차도 삼키지못할 정도로 기력이 빠진 그를 위해 약국과 더불어 장을 봐오겠다던 그녀는 그리 오래 지나지않은, 결혼기념일 1주년
때 사주었던 분홍빛 지갑을 가벼이 들고서 외출을 하였다. 이제 겨우 11시를 넘어선 시간대의 집은 너무나도 고요하다. 성민의 하나
뿐인 공주님도 낮잠에 빠진 듯 건넛방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어보인다.
침대에 누워 성민은 멍하니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본다. 반지는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있었지만, 그 청결함에 머릿속이 묵직해진다. 자
신은 거짓으로 물들어있는 것 같은데, 반지는 여전히 선한 빛을 발하며 성민을 마주하고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반지를 움켜잡고 돌려빼내버렸다. 그러나 곧 반지자욱이 남은 흰 손가락이 쓸쓸해보인다고 생각했다.
한참이나 반지,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들여다보던 눈꼬리가 힘없이 쳐지며 결국 다시 반지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매번 이런 식으로
반지를 빼내지 못한다. 죄책감때문인지 다소 헐렁한 사이즈의 반지이건만, 손가락을 죄여오는 것처럼 네번째 손가락 마디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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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소록 잠이 들었나보다. 얕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꺼풀을 떠보니, 그녀였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녀는 성민에게 약봉지를 내
민다.
‘감기약… 드세요.’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성민은 아무 말없이 그녀에게서 약을 받아들었다. 곧 미적지근한 물이 대령되었다.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은 상냥하다. 하지만 교류하는 시선은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않았다.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항상 그래
왔기에 서로는 별 말이 없었다. 마치 틀에서 조작되어 만들어진 스케쥴대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성민은 물끄러미 나가는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본다. 1년밖에 되지않은 반려의 뒷모습은 10년은 족히 된 것처럼 작고 축 쳐져있었다.
연애결혼도 아니고, 더군다나 성민 그 자신이 원하던 결혼도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집안은 아니지만, 학벌 좋은 큰아들에게 좋은 여자
를 쥐어주고자했던 부모님의 욕심에 건너건너 만나게 된 그녀와의 결혼은 어찌 보면 순탄했고 어찌 보면 기류에 휩쓸리듯 양가 부모
님들에게 이끌려서 하게 된 결과였다.
그의 반려가 되어줘야 할 여자는 곱고 참했다. 학벌도 나쁘지않았다. 성민의 부모는 그녀를 흡족해들었다. 얌전하고 순종적인 외양의
그녀는 말이 다소 없었다. 그것마저도 부모의 마음에 들었다. 말 많은 여자는 껄끄러워. 하며 그녀를 칭찬했다.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둥이같은 선남선녀가 만나니 딱히 바랄 것 없던 결혼도 제법 구실을 갖춰가며 하루하루
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피로연에서부터, 신혼여행, 그리고 아이를 낳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래 살다보면 미운 정이라도 들 텐데. 트러블도 갈등도 없는 그와 그녀의 집안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것은 그저 평온이란 이름으로 불
리워지는 침묵 뿐이다. 나른하고 고요하지만, 그 사이에 즐거움은 없었다.
이불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스폰지가 물을 머금은 것처럼 축 쳐진 몸을 이끌고 방 문을 나선다. 부엌가에 서있는 그녀가 보인다. 항
상 부엌가와 시장, 그리고 딸의 방에서 생활을 보내는 것이 그녀의 전부였다.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돌아보는 그녀의 의문이 서린 동공에 성민이 비친다.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는 성민은 작게 웃어보
였다. 고통을 동반하는 걸음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냥 웃어보였다.
저녁식사가 간소하게 차려지고, 성민은 입맛이 없는 입 안으로 죽을 떠넘겼다. 거실로 가려던 그녀를 붙잡고서 이런저런 얘기를 시도
해본다. 그녀는 가만히 웃기만했다. 정서적으로도, 취미로도 무엇도 별로 통하는 게 없는 둘 사이에서는 그저 가벼운 미소만이 마주 지
나갔다.
뜨거운 감정도, 차갑게 식은 원망도 존재하지않는 서로의 공간 사이로, 웃는 얼굴이 처연해보인다. 성민은 괜시리 슬펐다.
죽이 목에 메인다. 눈물도 목에 메인다. 자신도 그녀도, 무언가 너무나도 엇갈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자신도.
**
‘히익……!’ 엎어질 것처럼 몸이 철렁 하고 앞으로 쏠렸다. 덜컹덜컹, 사내 두 명이 들어간 화장실은 포화상태란 것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성민의 무릎은 앞에 놓여진 변기에 부딪히고, 규현의 등허리께는 문가에 쓸려 부서질 것처럼 사운드를 일궈낸다.
아침부터 이런 일을 맞이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었다. 규현이 원한다면 그 어디에서든지 성민은 그의 페이스대로 이끌려졌다. 그것
은 규현이 단순한 협박용으로 쓰이는 사진들이나 영상들에게 겁을 먹어서라기보다는, 묶인 자신의 모든 일상을 부수지않기 위한 성민
의 노력이었을 지도 모른다.
독기있고 고집도 셌지만 남에게 상처 주는 꼴을 보지못하는 순한 성격 탓에 적어도 규현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엉망이 되
어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을 부모님께, 그리고 그녀에게 보낸다고 하던 규현에게 성민은 울며 매달렸었다. 피해는 자신에게
만 돌려달라고…
이번에도 캠코더가 구석에서 조용히 돌아가고있었다. 각도는 볼품없었지만, 질척한 행위만큼은 무서우리만큼 잘 듣고있을 작은 기기
를 마주하는 성민의 눈가가 말갛게 젖은 지 오래이다.
성민은 공동용 화장실이 싫었다. 극도의 트라우마, 최초의 행위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었다. 그것은 마치 금기시된 제 모든 것들을 파괴
한 것 같아서 이 곳을 싫어했다. 차갑고 하얀 벽이 멸시의 눈초리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환경을 일궈내는 장본인은 묵묵히 성민을 괴롭히는 데에만 신경을 쓸 따름이었다. 절정을 맞이하고나서도 몸을
끌어안은 손의 힘이 채 풀리지않았다. 끈적하고 뜨거운 땀에 온 몸이 축축하지만 오히려 몸에 붙어오면서 후후 하고 웃는다.
“어제 왜 그냥 갔어요. 제가 바래다드릴려고 했었는데…”
뜨거운 숨만이 오가던 순간이 끝이 나자 어색한 기류가 둘 사이를 감돌았다. 상냥하게 말을 거는 규현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성민은 옷
을 입는다. 석세스 블루의 정장이 구겨져서 볼품이 없어졌다. 그 모습이 제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성민은 자조적으로 웃는다.
을 입는다. 석세스 블루의 정장이 구겨져서 볼품이 없어졌다. 그 모습이 제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성민은 자조적으로 웃는다.
아무렇지않게 와이셔츠를 걸치고 넥타이를 맨다. 협소한 공간 탓에 옷을 꿰입는 팔이 규현의 몸에 닿을 때마다 되려 놀라는 것은 성민
이었다. 그런 성민을 보면서 규현은 그저 웃고있을 뿐이었다.
“할 얘기도 있고… 해서 부른 거였는데, 피곤했나보네요.”
말투는 분명 사근사근하고 상대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들, 어디 하나 핀트가 올라간 것도 없지만 규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성민은 항
상 자신을 공격하는 기분이었다. 상사와 부하직원이란 관계, 그리고 어디까지 무너진 것인지 헤아릴 수 조차없는 이 관계가 아마도 규
현과 성민의 관계를 일직선으로 만들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긋난 관계는 메꿀 틈 조차 만들지 못하고서 하염없이 비틀리기만 했
다.
대화가 끊어졌다. 아니 애초부터 대화란 것은 존재하지않았었다. 일방적인 규현의 통보뿐이었다.
성민은 몸을 돌려 화장실 칸을 벗어나려했다. 규현이 서둘러 성민의 손을 붙잡는다. ‘제발 놓으세요. 실장님.’ 손을 비틀어빼려는 성민
을 무시한 채 억지로 꽉 끌어안았다.
“이성민씨.”
“…….”
미열이 느껴지는 화장실의 공기를 가르고 규현의 목소리가 침착히 울린다. 그러나 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의 정사로 조금 지쳐보이는 그의 몸을, 규현은 팔에 더 힘을 주어 꼭 끌어안는다. 그 작은 행동이 매개채가 되어 둘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몸과 몸 사이의 실랑이보다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간의 싸움들. 그것이 둘의 사이에서 일어나고있었다.
“성민씨.”
“…제발 놔….”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용건은 끝ㄴ….”
“……성민 선배.”
조심스레 불러오는 ‘선배’라는 호칭에 문뜩 어제 꾸었던 꿈이 스치듯이 눈 앞을 지나갔다. 30년 인생에 있어서 즐거운 한때였던 그 아
련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화사한 꽃다발만큼이나 고아하게 웃던 소년.
고개를 조금 들어 자신을 꼭 끌어안고있는 그를 쳐다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보이던 규현의 눈과 마주했다. 검은 동공이 성민을 내려
다보고있었다. 29살의, 어느새 10년이 지나 훌쩍 자라버린 그가 지금은 조금, 10여년전의 당신과 닮았다고 생각을 했다. 아니, 시간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시선을 들어올린 성민의 동공에 비춰오는 규현은 웃고있었다. 여지껏 보아온 웃음 중에서 가장 상냥히, 그러나 매우 아픈 웃음이었다.
그 헤진 상처들을 달고 있는 웃음은 어디선가 많이 본 표정이다.
항상 피하듯이 보아오던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덤덤한 그 눈동자가 조금은 젖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규현의 눈동자는 울음을 담은 채
성민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느껴진다.
꿈 속에서 본, 그리운 당신과 겹쳐져서인 것일까. 성민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풀었다.
“……선배.”
.
**
‘왜 혼자 있고 그래요. 남들은 다 놀러가는데.’ 규현이 준 꽃다발을 들고서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던 성민에게 규현이 던진 물음
이었다. 성민은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졸업식이라고 해서 딱히 특별할 필요는 없잖아. 라는 대답 대신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다.
겨울바람이 선들선들 창가에서 불어왔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차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료히 지켜보던 가운데, 규현이
일어섰다. 그러나 홀로 일어서지않았다. 어느새 제 손으로 성민의 손목을 부여잡은 채 성민을 억지로 일으키고있었다.
‘왜애 또.’
‘놀러가요. 이러고 있으면 뭐해. 영국에서는 졸업하면 얼마나 거창하게 해주는데요.’
‘흥, 영국 갔다온 거 티내기야?’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저랑 놀러가요. 솔직히… 섭섭하잖아요.’
그러면서 베시시 웃는 얼굴에 성민 또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마냥 잡아이끄는 손길이 거칠지는 않았다. 도서실 밖으로 끌리듯 걸어나
와 복도를 내달렸다. 스산한 바람결이 뺨을 타고 흐른다. 부서지는 겨울의 햇볕이 닿아오는 게 좋았다.
둘이서만 가는 극장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졸업식 날 가족들과 함께 동행해야할 시간을 둘이서 보낸다는 것은 상당히 색다른 일이었
다. 영화를 골랐다.
액션물 좋아해요? 아 벌써 매진이다… 멋쩍게 웃으며 뒤돌아보는 규현의 어색한 미소에 성민은 또 빙긋 웃는다. 그냥 둘만 있어도 즐
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마냥 계속 마주 보고 웃게만 된다.
결국 영화는 그나마 좌석이 빈 로맨스물로 낙찰이 되었다. 봄철 휴가이니 뭐니 하며 쉴 날이 많을 2월의 한때인지라 극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팝콘을 든 채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하얗게 빛나며 영상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어느 로맨스 영화들과 다를 바 없이 진부하고 어느정도의 복선을 여
실히 드러내는 장면에 규현은 조금 지루해진다. 여자 주인공이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팝콘을 입에 넣고서 쏟아지는 지루
함을 밀어내본다. 그러다
문득 옆의 성민에게 시선을 돌리니 진지한 눈망울이 스크린을 향해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다소 몰입한 듯 눈가가 조금 젖어있었다. 훌쩍거리는 소리도 조금 나는 듯 하다. 괜히 귀엽다는 생각에, 규현은 의자받침대에 있는 성
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성민이 고개를 규현을 바라본다. 여주인공이 우는 모습보다도 배는 애달프게 쳐진 눈꼬리, 촉촉한 눈망울에 규현이 비쳐들어 그러자 성민이 고개를 규현을 바라본다. 여주인공이 우는 모습보다도 배는 애달프게 쳐진 눈꼬리, 촉촉한 눈망울에 규현이 비쳐들어
온다.
‘왜 울고 그래요.’ 손가락을 들어 눈가에 일렁이는 눈물을 닦아주며 규현이 작게 속삭이자 성민은 저도 부끄러운 지 울던 그 상태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훌쩍이는 것은 여전했다.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참는 선배가 내심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 규현은 성민 편에 있던 왼손을 들어
올려 성민의 등을 작게 토닥인다.
어느새 결말이 지나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안의 불이 환해졌다. 상영관을 나서며 성민의 얼굴을 보니 눈물덕택에 콧끝은 발개져있
고 뺨이 눈물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풉 하고 웃음이 터진 규현의 웃음에 무안해진 성민이 손으로 규현을 밀쳐낸다.
‘… 못됐다. 조규현.’
‘하하하- 선배, 생각보다 울보네요. 항상 웃기만 해서 몰랐는데.’
‘그치만 슬픈 걸 어떻게 하라구.’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고. 감정을 여기저기 모두 퍼주다가 정작 성민에게는 아무 감정이 남아나지않을 것만 같다.
‘아이스크림 사줄게요. 그만 나가요.’ 라는 말에 이미 눈물도 그치고서 성민은 헤실헤실 웃는다.
사춘기를 막 다가서는 소녀같은 그의 면모에 규현은 설레인다. ‘웃다 웃으면 엉덩이에 뭐뭐 난다던데-‘ 놀리는 말에 발끈해서는 분홍
빛을 띠는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삐죽이는 입술이 ‘바보.’라고 반응해온다. 그러나 여전히 웃고있었다.
손을 마주잡고서 추운 거리를 걷는다. 규현은 손을 잡고 걸으며 자신의 걸음에 맞춰 걸으려 노력하는 성민의 행동에, 자신을 부르는 목
소리에, 무슨 말을 해도 귀여운 반응을 보이는 그의 손을 놓기 싫다고 생각했다.
**
가로등이 어둑한 공원을 비춘다. 오래도록 걸었나보다. 발이 아프다며 칭얼대는 성민을 데리고서 벤치에 앉았다. 거리를 벗어나 공원
에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남은 건 잔잔한 남색의 하늘과 몇 개 보이지않는 별들, 그리고 공원가의 잎사귀 없는 나
무들 뿐이었다.
발을 통통 바닥에 구르며 성민은 기분이 좋아보이는 얼굴로 아아- 하고 긴 숨을 토해낸다. 한적한 공원의 산책로에는 사람이 별로 없
었다.
‘후아, 재밌었다-‘
‘뭐가요? 걷는 게?’
‘…너어 진짜 그러기야?’
볼을 바람을 넣어서는 한껏 노려보는 폼새가 별로 무섭진 않았다. 규현에게 틱틱 거리며 자그만 입술을 오무리고서 삐죽이며 한다는
말이.
‘…… 너랑 보내서 재밌었다구. 바보 조규현.’ 이였다. 규현은 그 말에 기분이 한껏 올라선다.
적어도 오늘 졸업식을 잘 마무리 해준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고. 뭣보다도 성민의 반응이 사람으로 하여금 참 기대감을 품게 했다.
두근두근. 19살의, 소년의 심장이 조금 세차게 떨렸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휘영청 밝았다. 공원을 은은히 비추는 달빛에 성민의 얼굴이 한층 고와보인다.
‘그만 갈까?’ 애틋한 정적의 시간도 잠시 성민의 말이 공기를 가르고서 규현의 귓가에 닿는다. 어느덧 시계는 10시를 향해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었다. 회색 학생용 더플코트를 털며 아쉽다는 듯이 ‘이제 학교
에서는 못 보겠네.’ 라는 말에 규현은 잠시 행동을 멈춘다. 바지밑단을 정리하느라 숙이고있던 몸을 일으켜 성민을 쳐다보았다. 웃고있
는 얼굴이 달보다도 더 환해보였다.
‘규현이, 나 없으면 이제 도서실 안 가고 그러겠네.’
‘…글쎄요. 선배가 있어서 간 거 아닌데?’
‘에, 그러면 자주 가고 그래. 선생님 많이… 쓸쓸해하시구 그러기도 하니까…….’
서로의 전화번호도 알고, 집주소도 아는데. 마치 오래도록 못 볼 사람처럼 성민은 그렇게 규현에게 인사를 하고있었다. 규현은 못내 마
음이 상한다.
‘왜 그렇게 말해요. 자주 못 볼 사람처럼.’ 그 말에 머쓱한 얼굴을 한 성민이 뺨을 긁으며 마저 하던 말을 얼버무렸다. 응, 그냥. 그래도
자주 못 보니까… 이윽고 작게 대답해오는 그의 말에 규현은 얼굴을 작게 찌푸린다.
느릿느릿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걷던 둘의 공기가 조금 미묘하게 식었다. 규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성민은 핸드폰만 연신 꾹꾹 눌러대
고있었다.
버스정류장을 조금 앞두고서, 한적한 공원 근처에서 규현이 멈춰선다. 이에 성민도 덩달아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래?’
‘선배.’
‘…으응.’
‘사실, 오늘 하려던 말은 아닌데. 지금 하지 않으면, 선배를 자주 못 볼 거 같으니까. 미리 말해야 할 거 같네요.’
‘무슨… 말인데?’
성민의 대답에, 규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성민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다지 멀지않은 거리를 두고서, 규현은 마주 서서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조금 고개를 숙여 머뭇거리기도 했다. 성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 나말이에요.
당신의 동공을 마주하고서 말하는 첫 마음.
‘선배가… 좋아요.’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서, 선선한 바람이 뺨을 차갑게 식힐 즈음에서야 규현이 말을 꺼냈다. 그 짧고 간결한 한마디를 내뱉은 규현의
표정은 단호하기도 하고,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이처럼 참으로 불안해보였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성민은 에이 뭐야 시시하게 라는 안이한 반응을 보이며 활짝 웃는다. ‘나두 규현이 좋아해.’ 라는 그의 대답.
그러나 그 대답에는 규현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열정적인 감정들이라거나, 아련히 다가오는 묘한 정서들과는 거리가 먼, 단순
한 호감만이 내비추고있었다. 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저는…’
‘선배가 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너무나도 좋아서 내 곁에 두고싶다는 소유를 일깨워준, 규현의 첫사람의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항상 맑고 해사하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입술이 벌려져있었지만 작은 숨소리외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들바들, 작은 몸뚱아리가 떨었다. 추위때문이 아니었다. 공황에 질린 눈동자가 규현을 향하다 주변의 물체들로 분산이 되었다. 혼미
해진 시야를 간신히 부여잡으며 성민은 규현을 바라본다.
‘장난치지마. 졸업식 선물 치고는 너무 짖궂… 잖아.’ 성민은 그렇게 애써 웃는다. 그러나 규현은 고개를 젓는다. 진심이에요. 전 여지
껏 선배한테 거짓말 한 적도 없고, 하지도 않을 거에요.
전 선배가 좋아요.
‘아냐, …장난이라고 해줘. 제발… 그러지마.’
성민은 거의 울기 직전처럼 얼굴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1년이라는 길다기에는 아쉽고, 짧다기에는 많은 변화가 생기는 시간 속에서
사소한 접촉은 깊고 깊은 자욱들을 만들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소하지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특별한 사랑은. 성민은 밀어내고자 했다. 좋은 후배인
규현을 잃기는 싫었다. 상처를 주기가 싫었다.
‘규현아 있지. 사람은 말야… 때론 착각을 할 수도 있어. 그게 진짜 감정이 아닌데… 어느 순간 사랑처럼 느낄 수도 있는거야. 규현아,
너 그러면 안되는거야.’ 차마 웃어줄 수 밖에 없는 성민의 표정에는 울음이 어려있었다. 모순으로 일궈진 그 처연한 표정에 규현은 무
너진다. 밀쳐내는 당신의 감정에, 좋게 마무리를 짓고자 노력하는 성민의 억지미소에 규현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려온다.
‘……나. 이만 가볼게.’ 성민은 규현의 시선을 피하듯 몸을 옆으로 돌려 저만치 뛰어가버린다. 위태로워보이는 그 뒷모습이 영영 볼 수
없을 것처럼, 흐려지는 것 같아서 규현은 소리를 지른다. 가지마요. 제발 가지마.
‘…선배가 내 마음 안 받아줘도, 괜찮아.’
‘……규현아…….’
‘그렇게 뒤돌아서지말아줘요. 나는 선배 등을 볼 용기가 없어. 나 피하지마.’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렇게 가지마요.’ 규현의 물기어린 외침에, 성민의 몸이 잠시 멈춰섰다. 달이 내려다보는 공원 아래에, 마치 한
편의 눈물 겨운 드라마를 찍는 것처럼 엇갈리고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아닌, 낯선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다가오고있었다. 성민은 뒤도 돌아보지않고 뛰었다. 뒤에서 그
가, 규현이 따라오는 것만 같아서 힘껏 내달려 낯선 버스를 타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태운 버스가 규현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선배…….’
망연자실한 눈동자가 버스의 흔적만을 뒤�았다. 그리고 존재하지않음을 깨달은 마음은 결국 억눌린, 비명없는 눈물을 토해내고야만
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놓아주기 싫어서,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웃는 얼굴로 위로를 받고싶었다. 그는 착하고 얌전하니까, 항상 규현의 말에도 조근조근
따라주던 그라면. 자신의 감정을 어색하게라도 수용하지않을까. 라는 기대를 안았었다.
그것이 19살의 규현이 내린, 성민에 대한 감정의 결론이었다.
허나 성민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규현의 첫 발걸음은, 부푼 기대를 펑 터트리며 산산히 부서졌다. 도망을 친 사랑은 매몰차게
그를 돌아서서 영영 그를 멀리해버리고야말았다.
부재중인 핸드폰, 바뀌어버린 전화번호, 집에는 없는 당신. 완전한 거부에 규현은 결국 상처받고야만다.
규현의 처음 사랑은 아프다는 감정까지 그에게 깊숙하게 일깨워주었다. 결국 규현의 사랑에게서 도망을 친 성민처럼 규현도 도망을
쳤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서 다시 돌아간 영국은 규현으로 하여금 세상이란 것을 넓혀주었다. 19살의, 적당한 나이에 규현은 조금은 현실적
인 진리를 배웠다.
따스히 보듬고 항상 바라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조금은 애상적이고 필요한 진리였다.
그리고 지금.
10년 간 깨달아온 것을 다시 되돌리지않기 위해서, 규현은.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고있었다.
그것이 비틀린 집착이라는 죄목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좋았다.
**
업무가 도통 되질 않았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은 괜찮으세요?’ 라고 물어오는 유천에게도 변변한 대답을 하지못했다.
머리가 웅웅 울려온다. 바다, 바다를 가고싶었다. 아니 어디라도 좋았다. 저멀리 훌쩍 떠나 어지러운 심경을 조금은 흘려보내면 매일
시달리는, 이 끔찍한 두통이 나아질 것도 같다.
서류를 뒤적거리는 손길이 미적지근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침의 화장실에서 본 이후로 규현은 생각보다 조용히 성민을 내버
려두고있었다.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대에도 호출은 여지껏 없었다.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의 묘한 시선이 잠시 오갔다. 그
러나 그런 시선들 보다는 규현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성민에게는 불안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에는 생각치도 않던 것들이 마구 밀려드는 기분이다. 뒷통수 한 대 쾅 맞고서 얼얼해진 것처럼,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잠시 잊고있었던 기억들이 한데 몰아 역류하니 어질어질했다. 10년 전, 식어버린 추억들에 불과한 것들이건만 그 식어버렸던 존재들
이 누군가로 인해 다시 달구어진 것인지 머릿속이 지끈지끈 열기가 몰려온다.
서류 종이들만 움켜쥐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펜이 또르륵 굴러 책상 밑으로 떨어져도 주울 생각이 없어보이는 성민을 보는 유천의
안색도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사무실 분위기는 여전히, 조용하고 침착하다. 전화벨이 간간히 울리고, 서류의 가벼운 마찰음들이 들리고, 타이핑 소리가 섞여 공기중
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들떠있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바이어와들과 계약이 잘 마무리된 덕분에, 유럽시장을 확실히 붙잡는 데 일몫한 마케팅부
도 한층 더 바빠진 무렵이었다. 조용히 앉아 종이들만을 노려보던 부장조차도 일어서 간만에 회식얘기를 조금 꺼내자 다들 업무에 과
장될 정도로 몰입하고있었다.
그에 반해 성민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이미 기한이 지난 옛 파일들을 뒤적일 뿐이었다.
“이 대리님. 정말 괜찮으신거에요?”
“……아, 아. 예. 괜찮… 습니다.”
커피를 뽑아드는 성민의 뒤에는 어느새 따라나선 유천의 말에 성민이 몸을 돌려 유천을 쳐다보았다.
저런식으로 대답을 얼버무리고서는 다시 멍해지는 얼굴을 보며 유천은 한숨을 쉰다. 동전을 꺼내어 자판기에 넣고서 평소에 먹는 밀
크커피를 눌렀다. 잔잔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성민은 음울한 기색을 띤 채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종이컵을 입에 가까이 대고있었다.
한 달정도 회사를 다닌 유천의 시각에서 보는 성민은 친절하고 성격좋은 상사였다. 생김새도 단아한 그를 보면 호감이 드는 것은 저뿐
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성민은 홀로 고민을 안고사는 타입인 듯 싶었다. 매번 저런식으로 불안한 얼굴을 한 채 책상에서 숨을 고르는 걸 한
두번 보아온 것도 아닌데,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괜찮아요. 마치, 유천으로 하여금 자신으로 향하는 관심을 멀리 밀치려고 하는 것처
럼 선을 쌓고있었다.
물론 회사 내에서의 성민의 평가는 다소 좋은 편이었다. 승진유력자 중 한 명인 그의 신뢰는 여러모로 좋은 편이기도 했고 학벌로나 어
느 면모로 따져도 그닥 흉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점에 비하여 성민은 사내의 직원들과 조금 동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11
시 이후로는 실장실로 불려가서 점심시간이라는 사교타임을 흘려보내는 점도 그러했고, 위태로워보이는 성민의 태도 또한 한 몫을 해
주는 것 같았다. 유천은 그런 성민이 못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혼자 고민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고민은 무슨… 신경쓰지마셔요. 유천씨.”
미간을 꾹꾹 누르던 성민이 유천을 보고 작게 미소지었다. 유천은 성민의 얼굴을 보며, 웬지 모르게 그가 많이 피곤한 안색을 띠고있다
는 걸 느낀다. 저렇게 창백하고 마른 사람이었던가? 하는 의아감이 뇌리를 스쳤다. 한 달가량 사이에 묘하게 자신이 보아오던 이미지
와는 달리 너무나도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
“그나저나, 이 대리님… 한동안 못 보시게 되니까 서운하네요. 이제 곧 해외지사로 옮기시게 되니까…….”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들어온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아서 홀짝이던 성민의 앞에서 조잘거리던 유천과 그의 동기가 내뱉은 말에 성민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일회용 커피잔을 든 손을 흠칫 떨며, ‘예… 지금 뭐라고…?’ 라고 물어오는 성민의 얕게 일그러진 표정에 덩
달아 당황한 유천이 조심스레 그에게 묻는다.
“이 대리님, 이번 홍보마케팅 프로젝트로 인해 외국지사 발령나셨어요. 2주 후에 이탈리아로 갈 예정이라던데요.”
“…예? 그, 그런… 대체 누가.”
“조 실장님이 추천하신 덕분에, 그렇게 되었다고 다들 부러워하고 있는걸요.”
‘실장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으시던가요?’ 라고 이어 대답하는 유천의 말에 성민은 더 들을 것도 없이 남아있는 커피 그대로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채 뚜벅뚜벅 휴게실을 걸어나왔다.
유천이 뒤에서 ‘이 대리님?’이라고 불러오는 것을 애써 웃는 얼굴로 무언의 대답을 하며 엘리베이터의 대기버튼을 누른다. 우연의 일
치인지 높은 층수덕분에 번번히 놓치던 엘리베이터가 금방 성민의 앞에 당도했다. 심호흡을 하며 17층을 누른다. 울렁거리는 기분이
었다.
**
비서의 의아한 표정을 온 몸으로 받으며 실장실에 들어섰다. 일반적이라면 업무 외의 일로는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성민의 경우에는
워낙 자주 불리우는 지라 비서조차도 별 의심없이 들여보내긴 했지만 응시하는 눈빛이 사뭇 의문을 담고있음에 성민은 급히 실장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가 달린 문이 닫히자마자 센서가 작동하며 가볍게 닫힌다. 여전히 화이트 톤의 모던한 사무실이 깔끔히 정리되어있었다. 그
가운데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 또한 아침에 보았듯이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항상 성민이 들어올 때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던 규현이 오늘따라 성민이 들어오던 말던
별 반응 없이 모니터와 서류철들에게 눈을 떼지않은 채로 성민의 방문에 응답하고있었다.
‘웬일이시죠. 선배가 먼저 찾아오시고.’ 규현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에 성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웬일이시죠. 선배가 먼저 찾아오시고.’ 규현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에 성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제가 방금, 상당히 난감한 얘기를 들어서말인데요.”
“흠, 무슨…?”
‘난감한’이라는 형용어에 규현이 안경을 올려쓰며 성민에게 반문한다.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별 다를 게 없었다. 이런 규현의 모습이 오
히려 더 익숙치 않은 지라 어색함을 느낀 나머지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며 성민은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아있는 규현을 내려다
본다. 여전히 부동의 자세로, 단지 고개만을 올려 성민에게 시선을 맞추고있는 규현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가 유난히 거슬리던 성민은
책상에 다가서자마자 재빠르게 종이들을 낚아채들었다.
“이 성민씨, 이게 대체……!”
항상 조용한 태도의 성민답지않게 구는 태도에 당황한 듯한 규현의 표정과 함께, 성민의 손에 쥐어진 서류철에는, 성민에게는 유감스
럽게도 유천이 말해준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긴 문서들이 빼곡히 꽃혀있었다.
H그룹 전자 홍보 마케팅부 프로젝트. 계획 지사발령 공고와 상세한 스케쥴, 2주 내로 이태리로 당도하기를 요망한다는 회사 측의 안
내, 그리고 해당직원 사항에는 ‘이성민’ 이라는 이름이 프린팅 되어 그 안에 담겨있었다.
그러나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부근에 있는 신 외국지사로의 발령을 받은 인물은 성민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성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문서를 읽다말고 규현을 쳐다보았다. 규현은 어느새 무뚝뚝해보이는 페이스를 푼 채 예의 성민에게
자주 짓던 그 웃음을 가득 띠고있었다.
“어제 얘기해드리려던 게 바로 이거였는데, 그래도 용케 금방 알아내셨네요.”
“…어, 어째서 왜 마음대로……!”
“저는 그저, 능력있는 직원을 추천하라는 말에 선배를 추천한 것 뿐입니다만?”
“그, 그런…!”
“제 일을 보조할 직원을 골라야하는데, 선배만큼 잘 맞는… 사람도 없지 않겠어요?”
‘업무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환상의 궁합일테니까요.’ 가늘게 웃는 눈가가 무서웠다. 성민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어느새 일어
선 규현이 저벅저벅 성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문가에까지 다가선 성민과, 한 발자국밖에 차이 나지않은 규현의 눈동자가 교차
했다. 성민의 손에서 종이가 팔락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조규현 실장님.”
“아, 더불어 거절하실 권리는 없습니다. 가시지 않겠다면 상사의 권한으로써 강요라도 하겠어요.”
“조규현!”
“혹시나 싶어서 댁에도 연락드렸으니까, 되도록이면 준비를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성민선배.”
치밀한 성격만큼이나 재빠르다. 성민이 빠져나갈 방도조차도 봉해버리는 그의 철두철미함에 공포로 질려버린 성민은 입술을 꾹 깨문
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거절……!’ 성민이 채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턱을 억지로 잡아올린 규현이 성민에게 입을 맞췄다. 급작스러운
행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놀란 성민이 바둥대며 밀쳐내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그리고 예전의 시간들처럼 강제로, 규현
은 성민에게 키스를 요구하고있었다.
수 차례의 저항에도 끝까지 몰아세우는 규현 덕분에 진이 빠진 성민은 휘청거릴 것처럼 늘어지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어 몸을 세우
려 애썼다. 그 와중에도 혀가 섞이고 치열을 거칠게 부딪쳐오는 느낌이 괴로웠다.
한참 후에야 떨어져나간 규현의 밑에서 눈을 감고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있는 성민의 입 주변이 온통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켁켁 숨통이 그제서야 트여 기침이 흩어져나온다. 무너지는 몸을 가누지못하고서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결국은 울음이 터지고야 말
았다. 성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눈물을 가린다.
‘왜, 왜… 나한테 그래…….’ 성민의 울음 사이로 이런 말이 흩어져 규현에게 흘러들어오고있었다. 규현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바깥에서는 비서가 한창 전화로 업무중인지 다소곳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오고있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여느 때처럼 모두가 회사를 빠져나갈 것이었다. 몸을 조금 낮추어 눈높이를 맞춘 규현은 성민의 손을 억
지로 잡아내려 발개진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내린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잘 우는 건 여전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규현의 목소리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다정해서 성민은 다시 울어버
리고 말았다.
잊고지내오던 당신과의 추억이, 묻어두었던 그의 감정들이 갑작스럽게 폭풍처럼 몰아쳐와 성민을 헤집고있었다. 억지로 몰아세워 한
껏 능욕을 하던 그가 그때처럼 웃어줌에, 10년 전의 규현이 비춰져 성민은 혼란스러웠다.
“선배의 등을 바라볼 용기는 없어요. 저에게는. 그때도, 지금도.”
성민의 옷가지가 천천히 벗겨져내려간다. 아까 잘 매무했던 와이셔츠가 다시끔 구겨지고있었다.
이번에는 캠코더도, 사진기도 없었다. 규현의 마르고 강단있는 몸과, 성민의 흰 나신을 응시하고있는 것은 규현과 성민 본인들의 눈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전에 찍혀진,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사진은 여전히 규현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마치 리모콘과도 같았다. 성민을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매개체. 길들여진 공포심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성민으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고있었다.
“하지만…… 선배가 등을 돌리지못하게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흐, 규현…아… 싫…어… 제발 하지마-ㅅ…….”
“선배가 들어오지않을거라면. 억지로라도 끌고갈거에요. 그것이 설령 선배에게 눈물만 주더라도. 저는.”
‘선배를 제 마음 안에 가둘거에요.’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규현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숨을 삼키는 신음이 손 틈으로 새어나온다. 어지러웠던 추억들이 조금씩 관계를 메꾸다말고 다시 파괴되어버렸다. 이제는 더이상 아물 수도 없을 만큼 하얗게 가루처럼 부셔져버렸다.
둘의 관계에서 비틀려진 철창이 생겨났다. 열쇠가 없는 자물쇠로 문이 봉해진 철창은 성민의 모든 것을 박탈해버렸다. 의지도, 감정 ‘규민단편팬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록보기 낙인 규민모음(원래 [강특/규민]팬픽) 실연의 상처는 돌이 되고 철보다도 단단해져 규현의 심장을 하나의 새장처럼 만들고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민은 결국 그 곳에 갇혀버린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여전히 잿빛이었다. 비라도 올 것처럼, 그러나 아직 비는 오지않았다. 추운 날씨인만큼 눈이 올지도 모른다.
하얀 사무실 안을 고요히 흐르는 공기에게서 습한 냄새가 났다. 눈물냄새 비슷한 그 습하면서도 쓰라린 냄새는 마치 오래도록 그곳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공중을 홀로 영유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