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민단편팬픽} 그 남자의 반란

 그 남자의 반란

저자: 루소 

메무 : 최토깽님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이자 공휴일일 뿐이다. 굳이 남의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심어주는 분위기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 의무감이 남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도 아닌데. 거리에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오색 조명이 번쩍이면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게 집구석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솔로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한다. 모텔들은 남의 생일이라고 숙박비를 두 배로 더 받아 가는데도 방이 없어서 난리란다. 이는 곧 크리스마스로부터 10개월이 지난 9, 10월에 출산율이 가장 높다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왜 남의 생일에 출산이 저절로 장려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건가. 솔로는 이 기이한 출산 장려 대상에서조차도 철저하게 열외가 된다. 이처럼 솔로들에게 괜한 패배의식을 안겨주는 남의 생일파티 풍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도 솔로들은 이 사회적 분위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우리도 질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하며 솔로대첩인지 솔로혁명인지 모를 이상한 전쟁마저 선포한다. 그 전쟁을 있게 만든, 남의 생일에 솔로를 패배자로 만드는 괴상한 사회 분위기를 지탄해야 마땅하거늘. 왜 솔로들마저도 그 분위기에 수긍하게 만드는 건지. 규현은 실시간 포털 검색어 1위인 ‘솔로대첩’이라는 단어를 보며 혀를 찼다.

[12월 24일 솔로대첩: 크리스마스이브에 ‘솔로대첩’으로 불리는 대규모 미팅이 개최될 예정. 페이스북을 통해 시작된 이 행사는 12월 24일 오후 3시 남자는 흰색, 여자는 빨간색 의상을 입고 여의도공원으로 집결해 양편에서 대기하다 신호가 떨어지면 마음에 드는 이성의 손을 잡는다는 이벤트로 온라인에서 열띤 호응을 얻음]

그리고 규현은 노트북 덮개를 결연하게 닫았다. 그리고는 옷장 문을 열었다. 마침 옷장에 베이지색 더플코트가 걸려있었다. 꼭 흰색이 아니면 어떠랴. 그 비슷한 색이면 되지. 규현은 더플코트를 입고 현관을 나섰다. 전쟁에 참여하러. 규현도 생각만 앞섰지 결국은 그가 그리도 지탄하던 사회 분위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2.24 그 남자의 반란
w. 루소

원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규현은 날 때부터 지금까지 솔로로 20여년을 살아온 것이 제 인생에서 한 치의 오점도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섹시하고 프리한 싱글로 사는 것이 규현의 인생관이자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제 수준에 딱 걸맞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개중 ‘싱글’이라는 목표는 쿨하게 포기했겠지만 문제는 여태까지 규현의 인생에서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딱히 먼저 좋아해본 적이 없었던 규현이었다. 반대로 제 잘난 맛에 살만한 번듯한 외모에 훤칠한 키, 적당한 유머와 센스, 똑똑한 머리까지 갖춘 규현을 좋다고 하는 여자들은 많았으나 그것도 칼같이 거절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사귀는 것만큼 돈과 시간 낭비에 괜한 감정소모에 피곤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시간에 정액권을 끊어서 그토록 좋아하는 게임이나 한 시간 더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규현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규현을 보고 만리장성보다 고고한 철벽을 치는 남자라고 정의 내렸지만 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 커플들에게는 우월감을, 솔로들에게는 괜한 패배의식을 안겨주는 크리스마스 풍경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매년 단골 와인바에서 종류별로 늘어놓은 치즈와 와인을 즐기며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규현이, 올해 크리스마스만큼은 ‘누군가와’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 그 누군가는 바로 같은 과 선배이자 하우스메이트인 동해였다. 동해는 규현이 살면서 처음으로 호기심을 갖게 한 사람이었다. 규현과는 정반대로,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혼자 있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서 집에 혼자 남아있을 때면 규현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우는 소리를 했고, 크리스마스가 오기 한 달 전부터 집에 트리를 장식하고 직접 카드까지 만들어서 보낼 정도로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규현은 그런 동해가 처음에는 그저 귀찮았지만, 언제부턴가 동해가 하자는 대로-여전히 순순히 해주기 전에 한숨부터 푹 내쉬었지만-따르고 있었다. 규현은 그저 동해와 한집에 살다보니 동해에게 적응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규현아, 나 희원이랑 헤어졌다. 크리스마스에 희원이랑 여행가기로 했는데…….

크리스마스를 불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동해는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규현을 바라보며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했다. 규현은 날밤을 새면서까지 동해의 눈물이며 하소연을 모두 받아주었다. 그리고 울다 지쳐 잠든 동해를 침대 위에 눕혀놓고는 한동안 침대 곁을 떠나질 못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크리스마스를 혼자 집에서 보내게 생긴 동해에게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없을 텐데. 규현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크리스마스가 동해에게는 최악의 크리스마스였다. 규현은 여전히 남의 생일을 집에서 보내는 게 어때서, 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의 끝은 어느 샌가 의문형으로 바뀌어있었다. 집에서 혼자 보내면 좀 그런가, 동해 형이라면. 동해 형이라면, 이라는 생각이 앞서자 규현은 동해의 크리스마스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규현이 그토록 한심해하던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솔로가 동해라면. 규현은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작게 허물어진 철벽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찜찜하니까’ 올해 크리스마스는 동해와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보통 뭘 하며 보내는지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규현의 다이어리는 크리스마스에 동해와 할 만한 일들이 적힌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그런데 규현이 제 인생에 있어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결심을 한지 얼마나 됐다고, 동해는 그 다음날 희원이가 부른다며 허겁지겁 나가더니 언제 울었냐는 듯 해사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규현아, 나 희원이랑 다시 사귀기로 했어.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여행갈 거야.

규현은 동해에게 웃으며 잘 됐네, 축하해 형, 이라고 말했다. 동해는 짜식, 역시 너밖에 없다며 규현을 힘주어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인데 너도 친구들 불러서 놀아, 라고 한마디 하고는 다시 제 여자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 희원아, 내일 내가 너네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동해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동해의 방문이 딱딱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규현도 제 방으로 들어갔다. 환하게 불이 켜진 노트북 모니터 앞에 글씨가 빼곡한 다이어리가 펼쳐져 있었다. 규현은 다이어리 한 장을 찢어 느릿하게 구겼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럼 올해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내면 되겠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크리스마스로 돌아갔을 뿐인데 그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목이 콱 메었다. 뭔가를 잘못 먹어서라고 생각했으나 규현은 줄곧 빈속이었다. 텅 빈 쓰레기통에 방금 던진 종이뭉치가 저 혼자 두르르 구르다가 멈추었다. 결국 크리스마스라고 거창한 계획 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규현이 평소 하던 생각이었을 뿐인데 규현의 눈가가 갑자기 확 달아올랐다. 문득 고등학교 때 전교1등을 독차지하다가 딱 한 번 1점 차이로 2등으로 밀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들은 1등이나 2등이나 대단한 건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규현은 갑자기 꼭대기에서 산등성이로 굴러떨어진 기분이었다. 밀려났다. 그 생각에 눈가가 확 달아오르고 목이 메었다. 그리고 지금 규현은 동해 옆에서 김희원인지 뭔지하는 여자에게 밀려났다. 규현은 그 때처럼 ‘패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규현은 베이지색 코트로 무장하고 여의도광장으로 나선 것이었다. 규현은 높은 자존감만큼이나 지는 걸 못 견뎌했다. 넘쳐나는 승부욕은 결국 규현이 그토록 지탄하던 사회에 저 스스로 순응하게끔 만든 것이었다.

“하나, 둘, 셋 하면 각자 마음에 드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달리는 겁니다. 아셨죠?”

규현은 추위에 창백하게 질린 손에 힘을 주었다. 비록 체력 싸움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나 빨간 옷을 입은 저 여자들 중 한 명을 못 잡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규현의 승부욕은 때론 제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기도 했으니.

“하나, 둘, 셋!”

그러나 규현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짐승같은 포효와 함께 저와 같은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백의종군하듯 맹렬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규현은 소위 정신이 붕괴될 뻔했다. 그렇게도 다들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기 싫은 걸까. 규현에게는 상식 밖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니 정신이 붕괴되다 못해 공중분해될 만도 했다. 하지만 저 또한 상식 밖의 일에 몸을 던진 마당에 패배자 중의 패배자, 패배자 왕이 되기엔 규현의 자존심이 먼저 공중분해될 지경이었다. 규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은 대부분 하얀 옷을 입은 남자들의 손에 잡혀있었다. 젠장. 규현이 낮게 투덜거리던 찰나, 저만치서 웬 빨간 코트를 입은 사람이 발갛게 얼어붙은 손을 입으로 호호 불며 지나가고 있었다. 규현은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이도 그 빨간 코트에게 접근하는 하얀 옷들은 아무도 없었다. 규현은 승리의 쾌재를 부르며 순식간에 빨간 코트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

그리고 규현은 혹시나 빨간 코트를 뺏길 새라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어, 저기요. 잠시만요! 뒤에서 소심한 목소리가 규현의 귀를 톡톡 두드렸지만 승부욕에 불타 폭주하는 규현에게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저기, 어디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규현의 체력은 금세 바닥났고 승부욕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동시에 되돌아온 이성과 함께 소심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심한 목소리가 여자치고는 낮았다. 규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규현이 아직도 꽉 부여잡고 있는 손목의 주인인 빨간 코트와 규현뿐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고르던 규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갔다. 서늘해진 뒷목은 그저 한겨울의 추위 탓일까. 규현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남…… 자?”

빨간 코트의 손목을 부여잡고 있던 규현의 손이 맥없이 풀렸다. 빨간 코트는 손목이 아픈지 다른 손으로 손목을 주물거리며 규현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뽀얀 얼굴에 동그란 눈, 오밀조밀하고 선이 고운 이목구비는 곱상한 인상을 주었지만 헤어스타일과 체형, 옷차림은 영락없는 제 또래의 남자였다.

“저, 제가 남자면 큰일 나는…… 거예요?”

빨간 코트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빨간 코트의 눈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그것은 빨간 코트를 마주보고 선 규현의 표정이, 영락없는 패잔병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빨간 코트를 입고 지나가던 선량한 시민을 다짜고짜 붙잡고 납치하듯 달려간 규현이 이상한 건데, 빨간 코트는 영혼 없는 얼굴로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규현을 보며 꼭 제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자, 잘못했어요! 제가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릴게요!”

빨간 코트는 규현에게 쪼르르 달려와 규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규현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 빨간 코트의 손에 잡혀 산책에 억지로 끌려나온 애완견마냥 빨간 코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

“죄송해요. 다짜고짜 끌고 나와서.”

결국 규현과 빨간 코트는 여의도공원에서 멀찍이 떨어진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각각 아메리카노와 핫초코가 놓였고, 종업원이 가자마자 규현은 빨간 코트에게 꾸벅 사과를 했다. 빨간 코트는 발갛게 언 볼을 부풀리며 작게 미소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솔로대첩이 열린다는 건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기서 하는 건 줄 모르고 괜히 빨간 코트를 입고 나와서…….”
“저 솔로대첩 참가한 거 아닌데요.”

네? 빨간 코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지만 규현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굳어있어서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저는 솔로대첩 참가했냐고 물은 적이 없는…… 데요. 빨간 코트는 그 말을 속으로 꼴깍 삼키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는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머그잔만 감싸쥐고 있는 규현의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길고 가늘게 뻗은 손가락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코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렇구나.”

빨간 코트는 더 캐묻지 않고 수긍하더니 제 앞에 놓인 핫초코를 홀짝였다. 그럼 저는 왜 끌고 온 거예요? 라고 물을 법도 한데. 빨간 코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규현을 동글동글한 눈으로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규현과 눈이 마주치면 동그란 눈동자가 구슬처럼 아래로 도로록 내려가고. 뾰족한 입술을 오므려 핫초코를 호로록 작게 소리 내어 마셨다. 규현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머그잔을 입에 가져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참 자존심상하고 바보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저 동해가 여자친구와 약속이 생겨서 제 약속을 파했다는 이유로 홧김에 솔로대첩에 뛰어들다니. 지금쯤 동해 형은 희원이라는 여자와 기차 탔겠네. 그 생각이 미치자 규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써.”

동시에, 혀 끝에 아메리카노의 쓴맛이 번져나갔다. 규현은 아메리카노가 든 잔을 소리내어 내려놓았다. 동해 형은 대체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동해와 카페에 갈 일이 있으면 늘 동해는 아메리카노를 시켰었다. 생긴 건 단 거 좋아하는 초딩처럼 생겨가지고 입맛은 의외로 어른이었다.

“이거.”

그리고, 마찬가지로 단 걸 좋아하게 생긴 빨간 코트는 규현에게서 아메리카노가 든 머그잔을 가져갔다. 대신 규현의 앞에는 따끈한 핫초코가 놓여 있었다.

“이거 마셔 봐요. 맛있어요. 너무 달지도 않고.”

규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핫초코가 반쯤 든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쪽이 두 잔 다 마시면 불공평하잖아요. 그러니까 바꿔먹어요.”
“그게 무슨…….”
“어서요. 마침 저는 핫초코가 물렸거든요.”

규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빨간 코트는 볼을 씰룩이며 얼른 핫초코를 마셔보라고 재촉했다. 규현은 얼떨결에 핫초코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적당히 달고, 맛있었다. 구겨졌던 미간이 절로 누그러졌다.

“그럼 커피 왜 시킨 거예요?”

빨간 코트가 묻자 규현은 별 감흥없는 얼굴로 대꾸하며 한 모금 마셨던 핫초코를 쭈욱 마셨다.

“아는 형이 커피 좋아해서 따라 마셔봤어요.”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제가 커피 안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규현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빨간 코트는 배시시 웃으며 규현이 든 머그잔에 눈짓했다.

“제가 바꿔먹자고 하기 전에 한 번도 손 안 댔잖아요. 핫초코는 잘만 마시면서.”

그런가. 규현은 멋쩍은 얼굴로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머그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반쯤 남아있던 핫초코를 그야말로 시원하게 원샷했다.

“그러면 여긴 약속 있어서 온 거예요?”
“약속 있었는데 그 형이 파토 냈어요. 여자친구랑 놀러간다고.”
“그쪽은 여자친구 없고?”
“없어요. 크리스마스에 한 번도 누군가와 약속잡아본 적 없었는데 그 형이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울고불고 난리길래 기껏 같이 있어주려고 했더니…….”
“그래서 나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솔로대첩에 간 거였군요. 나도 애인 생겼다고.”

안 갔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한층 격양되어서, 규현은 굳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빨간 코트는 마냥 미소짓기만 했다. 여전히 규현과 눈이 마주치면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휘둥그레졌지만, 저를 보는 눈빛은 너 외로웠구나, 라는 측은한 눈빛이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두 눈이 탐험가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보이기도 하고, 사춘기 여자애처럼 새치름해 보이기도 하고, 엄마처럼 따뜻해 보이기도 하고.

“그 형이라는 사람, 좋아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규현은 정색을 했다.

“살면서 누굴 먼저 좋아해본 적이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형을 왜…….”
“저는 알 수 있거든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는지.”

늘 조근조근하고 여성스러웠던 빨간 코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단호하고 묵직하게 들렸다. 그리고 규현은 그 무게에 짓눌려 땅 아래로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와인이 당겼다. 와인의 맛에 익숙한 입이 아니라, 묵직해진 마음이 와인을 끌어당겼다. 와인은 그저 맛을 즐기기 위해 마셨을 뿐이었는데.

**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살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규현은 잔뜩 풀어진 눈으로 와인 바를 나섰다. 그 뒤로 성민-두 사람은 2차로 와인 바에 가서야 뒤늦게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나이를 밝혔다. 성민은 규현보다 나이가 한 살 위였고 동해와 동갑이었다-이 곧장 따라나섰다. 규현은 와인을 목구멍에 털어넣자마자 재생 버튼을 누른 오디오마냥 제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기 시작했다. 동해를 처음 만난 날부터 동해가 얼마나 바보같고 멍청한지, 게다가 눈물도 정도 헤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런데도 귀찮은 적은 가끔 있었지만 싫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동해가 가끔 싫을 때가 있었는데, 자기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며 웃고 울 때라고. 그게 그저 여자친구의 필요성을 못 느꼈던 제 눈에 한심해 보여서 동해가 싫게 느껴졌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는 말까지. 카페에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성민이 오히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규현의 말에 이따금씩 맞장구만 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성민이 형 말 듣고 보니, 어쩌면 그 형을 조금은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뭐, 말한들 뭐하겠어요. 그 형은 여자를 좋아하는데.”

결국 규현은 크리스마스를 동해와 함께 못 보내게 된 데에 ‘발끈해서’ 솔로 대첩에 갔다.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게 뭐 어때서, 라는 제 평소 생각을 뒤집어놓은 감정과 행동들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꽤 어려운 일이었군요. 여태껏 좋아하는 사람이 안 나타나서 그렇지 나타나면 당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규현과 성민은 버스정류장에서 나란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응, 어렵지.”

그렇게 말하며 성민은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확률도 적은데, 그 사람이 남자일 확률은 더 적으니까.”

그리고 물끄러미 규현을 올려다보았다. 규현의 입술 새로 새어나온 긴 한숨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규현의 시선은 버스정류장 표지판에 가 있었다. 우리집 가는 방향이 이쪽이 맞던가. 눈을 가늘게 뜬 규현의 옆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부서져 내렸다. 성민은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께에 손을 가져갔다.

“다음에 또 와인 한 잔 할래요? 연말이나…….”

그러다가 규현이 성민에게 물으며 고개를 홱 돌리자, 성민은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어? 라고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규현은 그런 성민을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왜 다들 크리스마스만 되면 의무감에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지 알 거 같아요.”
“어…….”
“그래서 연말에도…… 한 번 잡아보려고요. 그래서 좋으면 내년에 또 약속 잡고.”

규현의 말에, 성민은 멍한 얼굴로 두 눈만 꿈뻑거렸다. 약속이라. 그러면 그 다음에 규현이를 또 만날 수 있는 건가.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콩콩 뛰었다. 그러다가 규현이 약속 있어요? 라고 되묻자 성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난 아무 날에나 괜찮아. 굳이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성민의 대답에 규현은 하긴 그건 그래요,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성민은 말없이 휴대폰 버스 어플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춥다. 버스 몇 분 뒤에 오지. 이번에는 규현이 성민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뒤로 넘겨 드러난 자그마한 귀가 추위에 벌게져 있었다. 춥긴 많이 춥나보네. 그렇게 생각하니 성민의 허전한 목이 신경쓰였다. 규현은 목에 두르고 있던 제 목도리를 풀더니 성민의 목에 둘러주었다. 성민이 괜찮다며 허겁지겁 벗으려고 했지만 규현은 신경쓰인다며 성민의 코 아래까지 목도리를 둘둘 감았다. 너도 추울 텐데. 성민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규현의 두툼한 목도리 아래 폭 파묻혔다.

“어, 버스 왔다.”
“그래 규현아 먼저 가, 날도 추운데.”

규현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전조등을 번쩍이며 두 사람 앞에 멈추어섰다. 성민은 규현의 등을 떠밀다시피하며 규현을 버스에 태웠다. 어느덧 버스가 성민을 뒤로하고 떠나고, 규현은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마침 동해에게서 메시지가 여럿 와 있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와인이랑 게임? – 동해 형]
[아니 이번엔 다른 사람이랑 함께 보냈어]
[그래? 웬일이야~ 추운데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녔지? – 동해 형]
[목도리 빌려줘서 목이 좀 춥다]
[뭐야 너 올해 좀 이상하다? 크리스마스를 딴 사람이랑 보내질 않나 목도리도 나한텐 죽어도 안 빌려주더니 딴 사람한테 빌려줬다질 않나 – 동해 형]
[누구야 그 사람? – 동해 형]

동해의 마지막 메시지에, 규현은 잠시 액정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누구라고 해야 하나. 솔로대첩 가서 만났다고 하면 창피하고.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뭔가 허전하고. 규현은 방금 전 헤어졌던 성민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를 좋은 추억으로 남겨준 사람. 좀처럼 빌려주지 않던 내 목도리도 선뜻 내어줄 만큼 신경 쓰이게도 했던 사람.

[음… 좀 더 만나봐야 알 거 같아]

다음에 또 만나서 확인해봐야겠다. 이 마음 역시, 좋아하는 건지. 성민과 언제 만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규현의 입가에는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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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대첩을 소재로 리퀘를 주셔서 크리스마스 전에 드렸어야했는데 솔로대첩은 이미 끝났고 성탄절 자정이 되어서야 올리게 되었네요. 일단 최토깽님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그리고 왠지 리퀘하신 내용과 다른 느낌의 글이 된 거 같아서 뭔가 더 죄송스럽고ㅜㅜ 그래도 제 마음만은 듬뿍(?) 담았으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리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